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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제대로 느끼려면 시간과 계절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같은 장소라도 찾아간 시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자연을 찾는 즐거움이다.
그 장소를 찾아가면 언제나 그자리에 있지만 한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좋아하는 장소는 4계절 아침 저녁을 모두 지켜봐야 그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뜨거운 한여름 낮에 갑작스레 만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올라선 고택의 처마및 기단 위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을 바라보다 우연히 마주친 두꺼비 한마리와 눈싸움 한판을 벌여본 기억이 없다면 그 고택은 남산 한옥마을의 집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여행은 그 시간과 나만의 교감이고 그 순간 내가 있던 공간과의 대화이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아무리 많은 곳을 찾아 다니더라도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교감과 대화들이 가슴에 남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에너지 소비일 뿐이다.

Episode 01. 바다

해변을 따라 놓여진 데크길을 천천히 걷는다.
구름 낀 하늘이 쾌청한 빛은 아니지만 물기를 머금은 갯벌에 부드럽게 반사된다. 멀리 바람에 날려오듯 밀물이 잔잔한 파도와 함께 다가오고 있다.  
밀물과 함께 은은한 해풍이 불어온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몸을 어루만지는 해풍에 몸을 실어 본다.

오늘은 하늘이 맑지 않고 시간은 3시반을 넘기고 있다. 기온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분좋게 상냥한 봄날이다. 다시 찾아 왔을 때는 좀더 사납거나 짖궂은 모습을 보여 줄 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이 순간이 그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한다. 바람에 실린 바다향기의 진함이나 구름속을 새어나오는 빛의 밝기, 갯벌과 모래의 빛나는 정도, 수평선 멀리 밀려오는 바닷물에 반짝이는 햇살들을 기억속에 갈무리 해 본다. 

썰물로 드러난 갯벌의 끝이 까마득히 멀게 보인다

 

흐린 하늘의 구름사이로 희미한 무지개가 비친다. 구름사이로 내려온 빛은 밀물로 출렁이는 바닷물과 갯벌에 반짝인다. 사막에 온 듯하다.

데크가 끝나는 곳은 아직 밀물 시간이 되지 않아 갯바위 들이 온통 드러나 있다.
붉은 빛의 해안 바위들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물에 잠기겠지.
바위에 남겨진 파랑의 흔적들은 만조가 되면 바닷물에 다시 할퀴어질 운명임을 알게 해 준다.
어제만큼 딱 그 정도의 깊이로 잠기게 될까? 아니면 조금 더 잠길까?
내일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바위의 모습이 궁금하지만 나는 그때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해안 데크길을 따라 바다에 깎인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그려내고 있다. 붉은빛의 해안 바위들의 온갖 형상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바다와 해변과 산이 맞닿아 있다. 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난간에 앉은 수리 한마리가 나의 갈길을 응원해 준다. 
바닷가에 쌓인 돌탑이라니... 낯선 광경이다. 많은 이들의 기원에 나도 숟가락 하나 얹어 본다.

데크에서 내려와 등산로 입구 앞 갯바위에 걸터 앉아 잠시 멍 하니 앉아 있다.
불멍도 좋지만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물멍 또한 좋다.
눈을 찌푸리지 않고 빛나는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해안 데크에서 산책을 하는동안 까마득히 멀리 있던 바닷물이 어느덧 밀물이 되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런 곳에 등산로 입구가 있다. 10여 미터만 걸으면 바로 산이다.

여유로왔던 긴 산책은 그만하고 이젠 몸을 움직일 시간이다. 

Episode 02. 산

갯바위 위에서 등산화의 끈을 조이며 마음의 준비를 한다.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긴장감, 설레임으로 흥분이 된다.
바다를 지나 곧바로 산에 오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오르는 내내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행도 처음 겪는 일이다.
오르는 동안 단 한명의 등산객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무인도에 나 홀로 와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선택한 해안 산책로를 지나 오르는 등산 코스는 바다와 이어져 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산을 오를 수 있는 그리 험하지 않은 경관이 아름다운 경로다. 오르는 도중 여러 갈레의 둘레길 로도 이어져 있다. 둘레길은 하산때 지나가기로 하고 봉우리 정상까지 곁눈 두지 않고 오로지 직진한다. 봉우리에 다다를 즈음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해 바위를 건너고 올라타야 하는 험로가 잠깐 있다. 약 10여분만 강도높은 급경사를 기어 오르면 곧 정상이다. 이 산의 최고봉 정상은 좀 더 올라야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전망데크 라서 방문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인적인 드문 이 봉우리의 정상이 사회적 거리두기 에는 최적의 장소다. 

해변에서 마음에 드는 돌을 구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다. 산행 내내 손에 쥐고 걸었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호한 장면이다. 수면위로 빛나는 햇빛만이 그 경계를 알려준다. 해송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어우러진 모습은 무릉도원 같다

달래와 장수바위의 전설.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전투를 위해 바다로 나간 사랑하는 장수를 기다리다 전쟁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처녀 달래는 그만 삶의 의욕을 잃고 앓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장수는 달래의 죽음을 알고 죽은 달래의 비석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흘리며 슬퍼하다가 돌이 되었다. 그 후 달래가 숨진 4월이 되면 사랑하는 정인을 그리는 듯 달래의 비석에서는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달래꽃이 피어난다는 전설이다. 슬픔에 찬 장수의 얼굴과 그 앞에 그리움을 가득 머문 진달래 꽃이 정답게 마주한 모습에 그 애틋함이 가슴에 전해지는 듯 하다. 

내맘대로 지어낸 이야기

온 산 가득히 자라고 있는 진달래가 아직은 개화를 하지 않았다. 열 그루 중 한그루 정도 피었을까? 온 산 도처에 있는 진달래 가지들은 한껏 부풀은 꽃몽우라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산이 이미 울긋 불긋한 것을 보면 4월 중순께 다시 왔을 때 온산 가득 물든 진달래를 구경할 수 있을것 같다. 이곳에 다시 왔을 때 분홍빛으로 물든 진달래 물결로 가득할 광경을 상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레인다.

군목들 사이로 보이는 진달래꽃. 낮은 수목들은 모두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진달래 나무들이다. 꽃이 만개할 때 쯤이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을 해 본다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3평 남짓한 반듯한 사각형태의 평지가 나타난다. 걸터앉아 쉬기 안성맞춤인 평평한 작은 바위 몇 개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놓여 있다. 그 중 하나의 바위에 걸터 앉아 바다를 바라다 본다.

봉우리의 정상.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닐까?
산 위에서 운해를 보기도 하고 휘감아 도는 강물이나 도시의 야경을 본 적도 있지만  산 위에서 이렇게 가까이 바다를 앞에 두고 바라보는 것 은 생경한 일이다. 
경치에 취해 좀처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광활하게 펼쳐진 수평선은 길게 어어져 육지와 맞닿아 있다.

2주쯤 후 날씨 맑은 날 진달래가 만개하면 다시 이곳을 다시 찾아 온전히 하루를 보내 봐야겠다. 

- 지금을 사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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