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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즐겨라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인간의 어원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 를 의미함은 우리에게 고독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어디쯤인가에 고독이 존재한다.

고독은 누군가에게는 '고통' 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유' 를 의미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고독을 외로움으로 받아들인다면 마주하고싶지 않은 고통의 순간이 될 것이고 온전히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다시없이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

발 디딜틈 없는 지하철이나 강남 거리 한복판에서도 종종 고독감을 느끼는 걸 보면 고독이란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와 그리 큰 관련이 없는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고독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따뜻한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에도, 정다운 벗과 술한잔 기울이는 동안에도 마음 깊은곳에 숨어있는 고독은 시도때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찌보면 고독이란 내면에 감춰진 또다른 나의 모습인 듯 하다.

한때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누군가와 어울리고 대화하면서 신나게 놀면서 망각을 찾아 도망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고독이라는 친구와 가까와 지기 시작했고 언제인가 부터는 거울에 비친 나와 대화를 나누듯 고독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 고독이라는 것이 평생 나와 떼어낼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고독과의 만남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 느낌을 갖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던것 같다.

'고독에 몸부림 친다' 는 말을 한다. 고독과 외로움을 흔히들 혼돈하기 때문인가 보다. 고독이란 감정은 그렇게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란 것을 모르기 때문인가 보다. 멀리 타향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외로움이 밀려든다. 타국에서 멀리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친구를 생각하면 또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외롭다고 고독한것은 아니다. 
외로움이 느껴지는 때는 마주할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다.
내면의 내가 부재중일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고독이란 감정은 '자아' 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무언가를 위해 내 정열을 쏟아부을 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반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을때는 외로움 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내면이 나로 충만한 시기에는 외로움에 떨지 않고 고독이 반가와 진다.  
고독은 행복함이다. 만족감이다. 충만함이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때, 내 존재에 대한 회의가 몰려들 때, 상실감으로 좌절해 있을때 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의 자아가 흐릿해진 순간에 고독은 고통이다. 불안함이다. 삶의 걸림돌이다. 

외로움이 나와 타인간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고독은 나와 나 사이에서 우러나는 감정이다.
그래서 고독을 피하고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나 자신을 마주하기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루고 있느냐에 따라 고독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러니 고독과 긍정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한다. 내 삶이 긍정적으로 느껴질 때 고독도 즐거움으로 느낄 수 있다. 
완전한 고독이란 완전히 자유로운 기쁨충만한 순간의 다른 표현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이런 순간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삶이 고독하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영원히 고통스러운 고독과 죽는날 까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엄청난 부를 이뤘다고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지구의 아름다운 장소를 여행하고 다녀도 고독감은 늘 함께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며 살고 있어도 고독은 여전히 가장 가까운 나의 친구다.

진정으로 고독해 본 사람은 고독이 가져다 주는 평화로움을 안다.
한번 경험해 본 사람은 고독이란 절대 피하고 싶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요즘 캠핑을 즐기는 인구가 많이 늘었다. 캠핑할 때 제일 좋은 시간이 불멍할 때다. 타들어가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마음을 어지럽히던 생각과 번민들을 잊는다. 쉼없이 울려대는 휴대폰을 잠시 꺼두고 온전히 나만의 세계로 빠져드는거다. 
이렇게 캠핑을 통해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한다. 

고독을 즐기는 시간은 캠핑할 때 불멍하는 동안의 느낌과 매우 유사하다. 
불멍하면서 외롭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 자신에 온전히 침잠하면서 내면의 대화를 나눔으로서 지쳐있던 마음이 힘을 얻고 다시 살아갈 의욕을 얻는거다. 고독은 이렇게 나 자신과 직면하는 시간들을 의미한다.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고독은 불편한 진실이 될 것이고 자기사랑이 충만한 사람에겐 행복한 순간이 될 수 밖에 없는거다.

고독과 친해지려고 노력하자.
고독을 좋아하게 되면 확고한 자아와 건강한 내면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고독을 즐긴다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 지금을 사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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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을 강화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인 자기 확신이기도 합니다. 자기 확신은 스스로를 '가치 있다' 고 생각하는 인식, 인생에 어려움이 와도 잘 이겨 낼 수 있다고 믿는 자신감을 뜻합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마음에는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목표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은 목표지요. 하지만 이룰 수 없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다시는 안 볼 듯이 싸우는게 인생사 아닌가요. 그런 마당에 스타일이 다를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낸다는 건 불가능 하지요.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뇌에 입력되면 자존감이라는 주관적인 자기 사랑과 자기 확신이 흔들립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내 마음에 대한 이해가 우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 마음의 가치체계, 즉 내가 어떤 상황에서 내 행동을 근사하게 여기냐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나는 대가 없이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정을 베풀 거야' 라고 삶의 목표를 정하면 자존감은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치 있는 희생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감성적 보상을 요구하는 게 본능이니까요. 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부모조차도 자녀가 나중에 나 몰라라 하면 섭섭한 게 인지상정이죠.

내 마음이 다다를 수 없는 너무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하면 그 목표에 맞출 수 없기에 계속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목표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 기준으로만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면 자존감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학교 성적이나 승진 같은 사회적 성취는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항상 결과가 좋을 수만은 없거든요. 인생사엔 굴곡이 있는 법이고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강곡선을 그릴 수 밖에 없습니다. 

칭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은 남의 평가죠. 내가 아무리 모든 사람에게 열심히 잘 한다고 해도 그들이 전부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나한테 잘 해 주는 사람이라 해도 내가 싫어할 수 있듯이, 나를 별 이유도 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절을 못하고 꼭 할말도 못하는 행동의 이면에는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의 목표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외부 평가에 너무 의지하면 자기 확신이 떨어집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이죠. 알아주든 말든 나만의 소중한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겠다는 배짱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선 비교에 의한 외부 기준 보다는 본질적인 가치에 마음의 목표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무리한 목표보다 작아 보여도 가치 있고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워 성공경험을 반복해서 느낌으로써 자아효능감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안 좋은 마음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건 목표가 아예 없는 겁니다. 목표가 없으니 자존감을 올릴 성공경험도 할 수 없죠. 삶의 목표가 '열심히 살자' 인 분도 있습니다. 이 역시 목표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열심히' 라는 건 삶의 태도이지 목적이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자' 라는 목표가 있다고요?

'나를 솔직히 표현해도 통하는, 나와 케미가 맞는 사람들과 잘 지내자' 로 목표를 바꾸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을 잘하려면 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표현을 잘 못한다는 것은 관심이 너무 상대방에 쏠려 있다 보니 막상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뜻일 수도 있거든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은 자기주장도 잘 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거절 의사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채 타인에게 좋은 느낌을 주겠다는 목표만 갖고 있으면 타인에게만 나를 끼워 맞추게 되죠.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공허를 느끼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내려고 하지 마세요.

<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오겠습니다. (윤대현 저) 중에서 >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 는 말이 있다. 둥글게 살아가라는 의미다. 하지만 원만하게 살라는 말에는 견디고 참으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물론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즐거운 관계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언가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다. 코드가 맞는 친구나 연인 사이에는 비호감이나 싫어하는 성격의 상대에게는 기분 상했을 일도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는 관계가 아니라 즐겁고 편안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싶어 하는 사람은 그만큼 상대방의 평가와 시선에 목을 맨다. 조금이라도 안좋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못견뎌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한다. 나 보다는 상대방이 언제나 먼저인 경우가 많다. 친분의 깊이와 상관없이 그다지 친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조차 그렇다. 관계의 깊이와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좋게 보이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감정은 언제나 뒤로 숨긴 채 호감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치장하기 바쁘다.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부류다. 좀 더 과시하려고 애쓰고 자기에게 보여야 할 관심과 사랑의 에너지를 엉뚱한 데 소모하고 만다.
상대방의 평가에 상처받고 흔들린다.
뒷담화에 오르거나 자신에 대한 안좋은 소문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는 경우에는 어쩔줄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그렇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무시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남들의 시선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한다.

삶의 방식에서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목표한 소소한 것들에 도전하고 성취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오로지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목표도 남들에게 보여지는 일을 택한다. 그리고 자신이 목표한 일을 해내더라도 남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행복해 하지 않는다.
목표 자체가 '나' 가 아닌 '타인' 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통해 위안을 얻는 대신 관계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또다른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강한 자존심은 낮은 자존감의 다른 모습이다.

그다지 친분도 없는 내가 아는 수많은 그저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쏟아부을 에너지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 연인, 가족에게 좀 더 집중해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 지금을 사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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