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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고 혹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생각을 뒤집어 보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불확실한 것으로만 가득차 있다면 불확실 자체가 확실한 것이 된다. 명제의 모순이 발생한다.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태생부터 잘못되었다. 확실성의 반대편에 불확실성이 있는것이 아니다. 확실한 것이 없다고 모든것이 불확실 한 것이 아니다. 두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분리하여 모든 세상의 이치를 논하려는 출발 자체가 틀렸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도 불확실한 것도 없다는 것이 맞겠다. 확실성 과 불확실성 이라는 명제 자체가 모순이다.

확실도 불확실도 없다면 그럼 무엇이 있는가?

이 또한 틀린 질문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이 사라진다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A 와 B 가 세상의 전부이며 A 가 없으면 B 가 세상의 전부가 된다는 논리는 잘못된 생각이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A, B 가 세상의 전부라는 명제 자체가 거짓이다. 무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고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비어있는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시간과 빛의 흐름속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 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확실성과 불확실성과의 개연성은 아니다. '현상' 은 그 자체로 독립하여 존재한다. 확실과 불확실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가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꾼다 해서 인생이 달라진다는 전제 또한 모순이다. 

'현상' 의 변화를 일으키는 무수한 것들이 있다.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생각' 과 '행동' 으로 구분하는 것 또한 이분법적인 생각의 소치다. 생각이 행동에 영향을 주고 행동이 생각을 변화하고 그 사이에 오욕칠정이라는 '감정' 이 함께 존재한다. 여기에 사람의 의지가 개입하고 감정은 다시 현상에 영향을 미쳐 영향을 받은 현상은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것이 상호작용하며 순환하는 순환고리이다.

무엇이 우선이며 나중이고 우선에 의해 원인과 결과로 나눠 진다는 사고는 지극히 서구적인 논리이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생각과 행동이 같을 필요는 없다."

"행동하면 세상이 바뀐다."

이런 말들은 모두 원인을 제공하면 결과로 나타난다는 이분법적, 귀납적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생각해 보자.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다고 굳게 믿는 주장은 무언가 목적을 위해 다른 인풋을 줘야 아웃풋의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귀납적 사고를 한다. 세상만사가 인풋과 아웃풋만으로 이루어 진다는 가정하에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인풋과는 관련없는 아웃풋이 있고, (우리가 명명한) 원인과 결과는 상호 관련없는 독립된 현상일 뿐이다. 결정론에서 다루듯 무언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인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인풋이 있어도 아웃풋이 없는 경우도 있고 똑같은 인풋을 주어도 수만가지 다른 아웃풋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기에 결과를 만드는 원인이란 건 없다.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기에 행동이 인생을 바꿀 일도 없다.

 

모든것은 '현상' 을 구성하는 독립적인 요소일 뿐이다. 

 

내가 가던길을 가면 얻을 수 있었던 A라는 결과가 내가 다른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B 라는 결과로 바뀌게 된다는 생각이 잘못된 거다. 지칭하는 '결과 A' 는 내가 가던 길과 관련없이 일어나는 현상이고 '결과 B' 또한 내가 가던 방향을 바꾼 것과는 관련없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관련없는 것들을 이분법적 잣대로 연결지어 답을 찾으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행동을 하면 인생이 바뀐다". "생각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는 주장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 해 보인다. 서양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사고방식이다. 시크릿이란 책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편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확신하며 행동하면 우주의 기운이 몰려들어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삼류철학관 점쟁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직접 경험한 일이며 성공한 모든 사람들이 비밀리에 가지고 있는 비법이라고 써 놓았다.

직접 경험 했다니 믿어야 한다. 그 사람은 그렇게 믿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도 확실과 불확실의 이분법적 사고가 깃들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자꾸만 다람지 챗바퀴 도는 모습이다. 확실한 것은 없는데 간절하게 원하면 확실해 진다니 존재하지 않는것이 생겨난다는 말과 같다.

 

접근 자체가 잘못 되었다.

'현상' 은 우리가 인지할 수도 없는 짧은 단편의 시간 속에서 세상의 모든것이 상호작용을 하며 발생하고 지나가는 무언가 이다.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비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잘못된일 잘된일, 생각과 행동, 원인과 결과, 변화에 따르는 변화 가 아니라 잘못된일, 잘된일, 생각, 행동, 원인, 결과, 변화라고 우리가 규정지은 것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생기고 지나간다.

생각과 행동 외에도 의지, 희망, 희노애락의 감정 등 내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인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어나는 것이 '현상' 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실제로 일어나는 죽음, 비껴간 죽음과 같이 우리가 부르는 죽음이란 단어 하나에도 수많은 현상이 존재하고 현상은 나에게 다시 생각과 행동, 의지, 희망, 공포, 희노애락 과 같은 감정을 돌려주고 나는 그 현상에서 다음 현상으로 옮겨가며 존재한다. 내가 현상으로 부터 돌려받은 모든 것들이 다시 현상으로 나타나듯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과정으로 현상속에 투영된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모습이다.

 

역사는 그런 현상들의 기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또한 현상일 뿐이다.

역사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으려는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 확실성을 찾으려는 시도인 동시에 또한 존재하지 않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역사학자 E.H.Carr 가 "역사는 가정하지 않는것" 이라고 말한것을 보면 인류역사가 현상의 누적결과일 뿐임을 잘 알 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상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매우 깊이있는 고찰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발생했던 현상들에 원인이나 결과, 생각과 행동들을 연관 짓는 것이 의미없는 일이며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직시했음 을 알 수 있다.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정,반,합의 세가지 고리로 분류 하려는 것이 다소 무리는 있겠지만 모든 현상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하는 사고이다. 나비효과는 거시안으로 바라본 상호작용의 모습을 상상력을 통해 얻어낸 이론이지만 특별한 일도 신기한 일도 아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일어 났었을 일들이다.

 

그래서 뭐?

변화를 원할때는 행동이나 원인을 바꾸려 하지 말고 현상이 인류의 삶을 지배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노력을 중단하기 위해 알아야 할 단 한가지다.

현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내가 예측하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도 담담해 질 수 있다.

현상이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서 행동하는 것과 관련없이 일어나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내가 한 행동들에 대한 후회 에서도 자유로워 질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예측,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 또한 지금 일어나는 현상 들과는 독립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내가 가지는 망설임, 고민들 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을 사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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