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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수도로 지정되기까지 무학대사의 일화가 있다.

서울의 역사 중에서 무학대사와 왕십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새 도읍지가 들어설 명당 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도읍지가 될만한 곳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없어, 무학대사는 한양 근처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를 타고 지나가던 백발노인이 " 에이, 이놈의 소는 미련한게 꼭 무학을 닮았구나."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깜짝놀라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또 다시 소에게 "어리석게 좋은 곳은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는구나."하며 중얼거렸다.

무학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소승의 이름이 무학입니다만 혹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신지요?"

노인은 소만 쳐다볼 뿐 아무말이 없었다.

무학대사는 범상치 않은 노인이라는 생각에 도읍을 정할 곳을 찾고 있는데 좋은 터가 있으면 가르쳐달라 하였고, 노인은 무학대사를 쳐다보고는 손을 들어 동북쪽을 가리켰다.

"여기서 십리를 더 가시오."

무학대사는 "동북쪽으로 십리 더 가란 말씀이신지요?"하며 노인에게 되물었다.

노인은 새 도읍으로 쓸 만한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을 마치더니 서둘러 소를 몰고 가려했고 무학대사가 어디 사는지 묻자 노인은 무학봉에 사는 사람이라 하면서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무학대사는 노인의 뒤를 쫒아 무학봉으로 올라갔으나 그곳에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노인은 없고 도선대사의 화상만 모셔져 있었다. 바로 그 노인은 신라 말 풍수 지리설의 대가인 도선대사 였으며, 죽은 영혼이 잠시 나타나 무학대사에게 명당자리를 가르쳐 준 것이었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도선대사의 말대로 동북쪽으로 십리를 더 갔고, 그곳이 바로 북악산 밑의 경복궁 터였다. 그후 이곳은 십리를 더 가라는 뜻으로 "갈 왕(往)자에 십리(十里)를 붙여 지금의 왕십리"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왕십리 2동을 도선대사의 이름을 따서 "도선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600년전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서울을 새 도읍으로 정한지 600년이 넘는 지금, 왕십리는 서울의 시작과 함께 새로 태어난 마을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왕십리 하면 답십리가 빠질 수 없는데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밟았다해서 "밟을 답(踏)자에 십리(十里)를 붙여 답십리"라 하였고 도선대사가 무학대사에게 십리 더 가라고 해서 갔던 곳을 왕십리라 한다. (또한 다른 설에 의하면 답십리는 동대문에서 걸어서 십리에 위치한 곳이라 해서 답십리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서울은 유독 무학대사와 얽힌 일화가 많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기 까지 터를 잡고 지리를 살피기 위해 수많은 답사를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능했던 무학대사가 도읍에 적당한 위치를 찾는 중책을 맡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과 그 이름이 어떤 유래를 가지고 지어졌는지 한번쯤 생각하면서 사는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 지금을 사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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